십일조 에 대한 올바른 이해 | 온전한 십일조ㅣ김학철 목사, 연세대 교수ㅣ잘잘법 Ep.79 26972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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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에 대한 모든 것, 정리해 보았습니다.
십일조, 왜 하나요? 누구에게 하나요?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하는 건가요?
용돈도 십일조를 해야 하나요? 제가 번 돈도 아닌데요.
투자 수익에 대한 십일조는 언제 해야 하나요?
잘잘법에서 십일조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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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 – 케이바이블 온라인교회

성경대로 하자면 십일조는 창고에 쌓아야 합니다. 교회마다 창고를 마련해서 거기에 갖다 넣어야 합니다. 은행이 아닙니다. 예배당도 아닙니다. 창고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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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bible.kr

Date Published: 11/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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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의 올바른 이해-조정민 목사 – 인카네이션

정말, 십일조에 관한 핵사이다 같은 설교다~ 그동안 우리는 정말 제도로서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십일조라는 도구를 사용해 온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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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incarnationpub.tistory.com

Date Published: 3/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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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우리의 자세 – 네이버 블로그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여야 하며, 내 것은 십분의 일 만이 아니라 십의 십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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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4/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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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십일조의 정신과 삶 – 다음블로그

올바른 십일조의 정신과 삶 · 1)하늘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신다. · 2)메뚜기. 황충을 금하여 주며, 각종 재난으로부터 지켜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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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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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 : 기독교 – 기독일보

한쪽은 ‘십일조는 율법의 산물이며 신약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십일조는 예수 … 사실 이 모두가 다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성서적 견해라고 볼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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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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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십일조의 이해와 적용에 대한 총회적 입장정리

예장합동(총회장 박무용 목사)은 제100회 총회에서 신학부의 연구보고에 따라 ‘십일조’는 율법주의 신앙이 아니며,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헌금이 옛 언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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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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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살아 있는 십일조 < 문화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1장은 언약에 대한 깊은 이해로서, 십일조를 바르게 평가하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 언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한다. 2장은 피상적인 율법 이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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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5/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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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사랑의교회-우리들의 이야기 –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

지난 주일 설교 시간에 십일조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따로 홈페이지와 교회위챗방에 올리기로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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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zsch.org

Date Published: 6/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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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십일조ㅣ김학철 목사, 연세대 교수ㅣ잘잘법 E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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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1.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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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

성경본문은 말라기 3장 7절부터 12절 까지 입니다.

(7절) 만국의 주가 말하노라. 심지어 너희 조상들의 날들로부터 너희가 내 규례들을 버리고 떠나 그것들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돌아가리이까? 하였도다.

(8절)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내 것을 강도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주의 것을 강도질하였나이까? 하나니 너희가 십일조와 헌물에서 강도질하였느니라.

(9절)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나니 이는 너희 곧 이 온 민족이 내 것을 강도질하였기 때문이라.

(10절)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절)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먹어 삼키는 자를 꾸짖으리니 그가 너희 땅의 열매를 멸하지 못하리라. 또 너희 포도나무가 때가 이르기 전에 자기 열매를 밭에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니

(12절) 너희가 심히 기쁜 땅이 되므로 모든 민족들이 너희를 복 받은 자라 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여러분은 십일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제까지 십일조를 드렸습니까?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렸다면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했습니까? 십일조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십일조와는 무관하게 살았습니까? 또는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 죄책감 속에 살았습니까? 십일조 때문에 늘 꺼림직 하게 살았습니까?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는 입장에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교인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십일조를 철저히 했더니 물질축복 받았다는 간증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서 십일조뿐만 아니라 돈 문제에 있어서도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십일조에 대한 전통적 개념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말라기 3장 본문에 근거한 십일조 설교를 한두 번쯤 들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심지어는 근본주의 침례교회들조차도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설교하며 ‘압박’할 때면 언제나 말라기 3장을 인용합니다.

말라기는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는다면 결론은 이렇습니다.

‘모든 성도에게 있어서의 수입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8절]. 엄청나게 무서운 말씀이죠. 하나님 말씀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나니 [9절]. 왜?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먹어 삼키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꾸짖을 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1절].

그래서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온전히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라도 그 십일조를 취해 가신다. 예를 들자면, 교통사고가 난다든지, 질병에 걸린다든지, 입원을 한다든지, 분실한다든지, 무슨 재난을 당한다든지 한다.’ 우리는 이렇게 그동안 배워왔고, 이렇게 알고 있으며, 이렇게 설교를 들어 왔습니다.

또 10절 말씀에 따르면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물질적인 축복은 기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십일조를 바쳐서 나를 시험해봐라. 십일조를 온전하게 하면 내가 너희에게 가득 채워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멘, 안하십니까?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나를 시험해봐라!!

그러니까 말라기 3장 10절의 하나님 말씀을 믿는 교인들은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다른 면에는 신앙생활은 모두 엉망인데도 십일조만 철저히 하면, 물질적인 축복이 쏟아지는 줄 알고서 그러한 복 받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그러니까 물질축복 받고자하는 성도들은 형편이 어떻든지 간에 먼저 십일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회, 심지어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에서도 십일조에 관한 의견은 거의 일치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가르칩니다. 십일조에 대한 현대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여타 죄에 대해서는 오래참고 인내하시지만, 십일조를 안 하는 죄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징계하시고 보응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비슷한 간증을 많이 들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안했더니 우환(憂患)이 닥쳤다.’ 또 하나님께서 다른 선행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으시지만, 온전한 십일조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크게 보상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한 가르침에 세뇌된 교인들은 다른 사람이 아프거나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역시 십일조를 온전히 하지 않더니만 그렇게 되는구나.’ 라고 쉽게 단정 짓습니다. ‘십일조를 온전하게 안 하더니만! 쯧쯧.’ 하며 철저하게 수입의 십분의 일을 떼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교인들은 자기처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책망합니다. (어라, 저 집사는 왜 저럴까?) 기회만 있으면 이야기를 하지요. (어, O 집사, 이리 와보라고. 십분의 일을 떼서 반드시 드려야 해.)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은 자신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고, 또한 자신의 모든 소유에서 철저히 십일조를 드린 사실을 하나님께 상기(想起)를 시켜드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 나는 내 소유의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시죠? ‘하나님, 축복하실 때 좀 감안(勘案)하세요!’

성경에 따라서 십일조 문제를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은 채 무조건 강조한다면 교회를 운영하는 데에는 현실적으로 도움을 줄 것입니다. (돈! 좋잖아요. 교회로 돈 많이 가져오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러나 십일조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정확한 진리를 제시하며 가르치지 않는다면, 현실적인 도움은 있을지언정 각 성도들의 영적 삶에는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은 과연 십일조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율법이다.

성경 앞에서는 이제까지 내가 뭐라고 생각하고, 뭐라고 믿었고, 뭐라고 가르침을 받아왔던지 간에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대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입니다. 오늘날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이건 안하는 사람이건 수많은 교인들이, 십일조를 강조하건 강조하지 않건 대부분의 목사들도 차분하게 십일조 문제에 대해서 성경을 찾아가며 공부할만한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인과 목사는 그냥 어디서 배우고 들은 대로 가르칩니다.

십일조(tithe)라는 용어와 십일조에 대한 설명, 그 내용과 원칙은 기본적으로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십일조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신약성경에는 8번 나옵니다. 32번은 구약에 있습니다(창14:20; 레27:30-32; 민18:24,26,28; 신12:6,11,17;14:22-23,28;26:12; 대하31:5-6,12; 느10:37-38; 12:44; 13:5,12; 암4:4; 말3:8,10).

신약성경에는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 누가복음 18:12에서 세 번 나오고, 나머지 다섯 번은 전부 히브리서 7장에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 중에서 어느 구절도 그리스도인에게 십일조의 의무를 부과하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바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단 한번도!

십일조는 교리적으로는 지금 주님을 섬기고 있는 교회의 신자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에 십일조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그 외의 위대한 사도들이 신약성도들에게 헌금에 대한 말할 때, 왜 십일조라는 단어를 쓰도록 허락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사도들은 헌금의 의무를 설명하면서 아무도 ‘십일조’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한 번이라도 기록했으면 간단했을 텐데. 그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교회 시대에 누구에게라도 강요할 수 없는 구약의 율법을 되살리는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드는 일임을.

성경이 기록된 진리라고 해서 아무런 구분 없이, 시대의 구분도 없이 아무렇게나 발췌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그대로 하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단(異端)이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진리라고해서 아무것이나 가져다가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와 바른 영적 사귐을 맺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는 거짓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이단(異端)의 가르침은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않는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이 방언(성경의 방언은 전부 외국어)을 하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것이 잘못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방언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방언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시대가 맞지 않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증인들이 왕국복음을 전하고 다니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단이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국복음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단입니까? 지금 이 시대와 맞지가 않습니다.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를 못해서 적용을 잘못한 것입니다. 신유(神癒)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틀린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자신은 사도직분을 계승 받았다고 한다면 우린 그를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사도직분이 성경에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잘못됐지요? 그 사람들은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디모데후서 2장 15절]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가져다가 창고에 넣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창고! ‘스토어하우스’(storehouse)입니다. 창고! 창고는 어디 있습니까?

십일조를 쌓아놓는 창고는 어디 있습니까? 창고는 구약시대 성전에 딸린 건물이었습니다. 봉헌한 물건들을 성전에 딸린 창고에 쌓았습니다. 느헤미야 10장 38절.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취할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이 레위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우리 하나님의 집의 방들로 가져다가 보고(寶庫) 집에 둘지니.

지금은 돈을 은행에 보관합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은행’이라는 단어도 모르셔서 십일조를 창고에 두라고 하셨겠습니까? 성경에는 ‘은행’이란 단어가 분명히 나옵니다. 누가복음 19장 23절! 은행에 맡기면 이자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경대로 하자면 십일조는 창고에 쌓아야 합니다. 교회마다 창고를 마련해서 거기에 갖다 넣어야 합니다. 은행이 아닙니다. 예배당도 아닙니다. 창고에 넣으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곡식이나 물건을 모아서 보관하는 창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고치거나 왜곡하지 맙시다. 사실 그대로 말해봅시다.

많은 부작용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십일조를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는 교회의 수입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교회의 운영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솔직하게 시인하셨습니다. ‘아! 그 사람이 십일조를 내야지 교회가 운영되는데 왜 안낼까!’

돈 많은 교인이 십일조를 내야지만 교회가 운영될 수 있다는 단순한 계산에서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 십일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십일조를 강조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말씀도 있고, ‘복을 쏟아 부어주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런 구절을 적절하게 활용하면 십일조를 강요하기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물론 교회는 운영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운영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 돈은 교인들의 손에 의해서 충족됩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할 일은 교회 운영을 걱정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양 무리들을 목양하라고 사람을 세우실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그 설교자에게 혼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말씀으로 성도들을 양육하라고 지시하신 것이지 교회의 운영을 걱정하라고 그를 세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는 반드시 잘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운영은 주님과 올바른 사귐을 갖고 있는 성도들의 성실한 ‘헌금’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지 마음에는 없는데 억지로 내거나, 율법에 근거해서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지만 물질축복을 받는다고 강요해서 교회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사람은 기뻐할지언정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목회자로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에 대해서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교회운영이요? 이 교회는 여러분들의 교회입니까, 교회운영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좀 걱정해 주십시오. 나는 교회 운영에 대해서 걱정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맡겨주신 영혼들에 대해서 먼저 걱정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사역에 있어서 목적이 왜곡되면 신자들이 하나님의 일에 돈을 내는 일과 교회에서 헌금을 모으는 일이 주님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에서가 아니라, 무서움과 두려움! 또 이렇게 안하면 우환(憂患)이 닥칠 것 같은 마음! 더욱이 말라기 3장을 보니까 십일조 떼먹은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정말 무섭다! 또 십일조 해야지 물질축복을 받는다 하니까… 그러한 동기에 의해서 되기가 십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라기 3장의 내용을 아무런 구분 없이 가르칠 때 발생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성경을 올바르게 나누지 않는다면 당장은 이익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영적 삶에는 별로 유익을 끼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손상을 끼칩니다.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는데, 정말 기쁨과 자원함과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것과 이것을 안 드리면 사업이 망할 것 같고 교통사고가 날 것 같고, 병에 걸릴 것 같은 마음에서 드리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만큼 엄청납니다.

십일조와 할례의 근거는 동일하다

십일조를 반드시 해야 할 의무사항으로 강요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한다든지 유대인의 모든 명절, 유월절이나 장막절을 지키라 한다든지, 아니면 동물로 희생제물을 바치라고 한다든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다든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말 다르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신약교리로 가르치는 교회나 목사들의 주장 가운데 하나는 이렇습니다. ‘아, 이건 율법이 아니다! 물론 율법에도 있지만 모세의 율법 이전에 은혜의 시대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야곱을 통해서 우리가 이 십일조를 배운 거다. 율법시대 이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율법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도 은혜의 시대에 사는 우리도 모세의 율법과 상관없이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반드시 드려야 한다. 그래서 율법 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도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드려야만 한다.’ 정말 이러한 주장이 맞는다면, 같은 이유로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했듯이 율법 이후 시대인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 남성들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창세기 17장 24절]. 율법 이전에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반드시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할례도 받아야합니다. 십일조도 바치고 율법 이전에 받은 할례도 다 받아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안디옥 교회의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사실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신자들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가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 [사도행전 15장 10절] 그들은 자신들도 메질 못하고 조상들도 지질 못했던 멍에를 새롭게 복음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부담시키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자 보세요.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한다면, 같은 시대에 같은 사람이 두 가지를 행했는데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하고,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안 해도 된다는 그러한 원칙을 누가 정한 것입니까?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할례도 받고, 십일조도 했는데 십일조는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해야 되고 할례는 하면 안 되고 그런 원칙은 도대체 누가 가르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175년을 살았습니다. 175년을 사는 동안에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은 창세기 14장에 딱 한번입니다. 175년 동안.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통해서 구원받은 것도 아니고 십일조 생활을 착실하게 했기 때문에 물질 축복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가지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된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벗어난 가르침입니다. 물론 십일조를 강조하는 모든 목사들이 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일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각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삶을 걱정하고 주님과의 올바른 사귐에 대해서 걱정하기 때문에 착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라고 강조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드리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십일조 자체에 대해서 필요이상으로 강조함으로 신자들에게 의무조항으로 놓는 것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성경을 충실하고 정직하게 연구하지 않은 결과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게 그냥 들은 내용, 책에서 읽은 내용,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죠. 어떤 그리스도인이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열심을 내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불법인 경우도 있습니다. 올림픽에 나가서 어떤 100m 선수가 죽을힘을 다해가지고 9초 만에 들어 왔습니다. 근데 실격 일 수 있습니다. 실격인 경우에는. 금메달 못 땁니다. 왜? 다른 사람 트랙으로 왔다 갔다 했거든요. 아주 죽을힘을 다해서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법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성도의 십일조 생활

구약 성도들은 어떻게 십일조 생활을 했을까요? 십일조에 대한 기록 대부분은 모세의 율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과 야곱은 자발적 의지에 따라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들에게는 십일조가 강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는 자유의사가 아니라 의무사항입니다. 율법 하에서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반드시!! 안하면 큰일 납니다. 레위기 27장 30절. 땅의 모든 십일조 곧 땅의 씨나 나무 열매의 십일조는 주의 것이니 그것은 주께 거룩하니라.

의무사항으로써의 십일조는 성막을 관리하며 레위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국가적으로 정해진 세금과 같습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신정(神政)국가에서 살았습니다. 대통령이나 왕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곧 헌법(憲法)입니다. 모세의 율법아래에서 십일조는 오늘날 국민의 의무조항인 세금(稅金)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거부하게 되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 하고 십일조를 삼키는 자가 되는 것이며 저주를 받는 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는 한 가지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십일조는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십일조는 몇 종류가 있습니다. 매년 내는 십일조가 있고, 또 삼년마다 한 번씩 내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먼저는 레위지파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드리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두 구절 찾아보겠습니다. 민수기 18장 24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십일조 곧 그들이 주께 거제 헌물로 드리는 것을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 상속하게 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상속 재산을 갖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이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럼 그걸 누가 갖습니까? 레위사람들이 갖는 것입니다. 레위 사람들! 그들은 상속받은 땅이 없기 때문에 다른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이 십일조로 드린 것을 가지고 먹고살았습니다. 또 한 구절 보겠습니다. 신명기 14장 22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네 씨의 모든 소출에서 반드시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당시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짓고 일 년에 한번 수확을 하면 십일조는 어떻게 했을까요? 반드시 드립니다. 일 년에 한 번씩 해마다 십일조를 드립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이게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또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가 있고, 삼년마다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28절을 보세요. 신명기 14장 28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삼년이 끝날 때에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가져다가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 자 그러면 삼년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은 용도가 다릅니다.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들, 고아, 과부들을 돌보기 위한 십일조가 3년에 한번 드리는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6장 12절을 보면, … the year of tithing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정해져 있습니다. 삼년에 한번씩.

아모스 4장 4절에도 아침마다 너희 희생물을, 삼년 뒤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 이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들, 고아와 과부를 돕기 위한 십일조입니다.

개역성경에서 왜곡된 십일조

그런데 십일조를 많이 거둬드리려는 목사들 입장에서 보면 아모스서 4장 4절에 삼년 뒤에 십일조를 가져오라는 말씀을 읽고는 깜짝 놀랍니다. ‘어, 십일조를 삼년 뒤에 내라고! 이거 말도 안 돼!’ 그 다음에 그들이 어떻게 했을 까요? 성경을 뜯어 고쳤습니다. 개역성경이 뭐라고 뜯어 고쳤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삼일마다 십일조를 내라고 그렇게 성경을 뜯어고쳤습니다. 사람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불결하게 손질을 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현금(現金)으로 드릴 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출의 십일조를 드릴 때 그것은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들에게 주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를 한사람이 일 년 동안 드려야할 전체 양은 대략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23%입니다. (본래 가지고 있는 가축의 십일조, 매년 새롭게 나오는 소출의 십일조, 삼년마다 드리는 십일조) 만약에 당신이 성경에서 정한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려한다면, 수입의 23%정도는 드려야 됩니다. 무지에 의해서든 불신에 의해서든 자신이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도응답을 잘해주시고 물질축복을 해주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바리새인들에게 성경은 그들이 지금 십일조에 관해서 착각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내 수입의 철저하게 1/10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구약시대를 살던 유대인을 닮고자 한다면 23%를 내야합니다. 또한 구약의 십일조는 대부분 곡식과 가축입니다. 유대인들은 소산과 소출에서 십 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십일조 드릴 것을 따로 분리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건지는 것은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린다. 이 가축들은 십일조다.’ 이렇게 따로 분리해 놨는데 이것들을 팔게 되는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이 경우 십일조로 정해놓았던 곡식이나 가축을 돈으로 바꿨더라도 당연히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27장 31절을 보면 이런 경우에는 원금에다가 1/5를 더하여 십일조로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하에서의 십일조는 대부분은 곡식과 가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금으로 바꿔서 드릴 경우도 있었습니다. 현금으로 바꿔서 드릴 경우에는 1/10이 아니라 12%입니다. 왜냐하면 1/5를 더하도록 성경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금으로 십일조를 드릴 때는 12%를 드려야 합니다.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제가 오늘 정답을 드리겠습니다. 수입의 12%가 철저한 십일조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입의 1/10로 십일조를 드리고 있는 신자가 자신이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물질축복 하셨다고 한다면 성경과 어긋난 주장입니다. 철저한 십일조는 10%가 아니라 12%입니다. 현금(現金)일 경우에는 12%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의식

십일조를 받는 사람도 분명합니다. 히브리서 7장 5절입니다. 진실로 레위의 아들들 중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서 십일조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다시 읽어봅시다. 진실로 레위의 아들들 중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서 십일조를 취하라하는 명령을 받았으나

모세의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입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십일조를 반드시 드려해야 할 의무조항으로 여긴다면 동일한 이유에서 할례나 안식일이나 유월절이나 장막절이나 동물희생제 등도 지켜야 합니다. 또 십일조를 받은 뒤에는 의식이 뒤따라옵니다.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으면 AN HEAVE OFFERING 거제헌물 이라고 해서 그 십일조 헌물을 하나님께 높이 들어 올려서 바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민수기 18장 24절. 지금은 그런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돈 밝히는 목사들이 십일조 봉투를 높이 들고서 공개적으로 이름 부르며 기도하는 의식에도 나름대로의 성경적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누구 집사님 십일조 헌물 하셨습니다.’ 정말 구약에서 레위 사람들이 시행했던 거제 헌물과 똑같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분명히 가르쳐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이 현재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육체는 연약하여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수입의 12% 드립니까? 23%를 드립니까? 당신의 수입에서 정확하게 10%를 정말 드릴 수 있습니까?

부모님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것의 십일조는 어떻습니까? 은행에 돈을 맡겼더니 이자가 붙었습니다. 그 이자의 십일조는 어떻게 하십니까? 친구로부터 생일 선물을 받았는데 십일조는 하셨습니까? 예상치 못한 이익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누가 감히 나는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할 수 있습니까?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자격이 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도응답을 해주실 것이며 물질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돈을 하나님께 드렸다면 그것은 투자(投資)일 뿐입니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투자 말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투자했으니까 나에게 10배로 돌려주십시오!’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이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므로 신앙생활을 유지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초등원리로 되돌아가서 다시 율법에게 종노릇을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을 노예로 전락하게 만듭니다. 신앙의 자유와 기쁨을 빼앗아가고 의무와 규범만을 남깁니다. 여러분이 십일조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정말 자유와 기쁨을 줍니까? 아니면 의무와 규범만 남았습니까? 십일조라는 주제가 여러분을 율법의 종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모든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나 그 율법의 요구사항이 명절에 대한 것이든, 유월절이든, 장막절이든, 십계명을 지키라는 요구이든, 동물희생물을 바치라는 요구이든,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라는 요구이든,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의 요구로부터 우리를 해방 시켰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율법의 요구로부터!

사람들은 자기 소유의 1/10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말은 거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소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몽땅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과 영,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 소유물의 십분의 일만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모든 율법의 요구사항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일조에 대해서 ‘반드시’라고 요구할 자격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대해서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소유였지만 또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유대인들에게 요구한 세금을 강요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놀라운 사역을 가볍게 여기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드리는 헌금이 올바르다.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에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합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받은 성도에게 ‘반드시’라고 십일조의 법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권한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모든 요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참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말라기 3장에 근거한 십일조,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십일조, 신앙의 자유가 없이 규범으로만 존재하는 십일조, 이런 것은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드리는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면 어떤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야호 해방이다. 해방! 십일조 안 해도 되는구나. 속 시원하다. 우리 목사님이 그렇게 가르쳤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진리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물론 십일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이 설교가 의미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하면서도 십일조라는 법에 얽매여서 돈 문제에서 자유로움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돈 문제에 대해서 자유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자유로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조문인 십일조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조상들도 감당하지 못했고 우리도 감당하지 못하는 불필요한 멍에를 다른 성도들에게 지우지 않아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자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는데 그 자유를 얽어매는 속박의 멍에를 감히 누가 성도에게 얹어놓는단 말입니까? 십일조는 레위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신정국가에 살던 유대인에게 정해진 세금(稅金)입니다. 신약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단 한 구절도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약에 십일조란 단어가 8번 나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 아브라함의 십일조, 레위인들이 받았던 십일조를 합쳐서 5번,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 3번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십일조는 전부 위선자들인 바리새인들이 드렸던 십일조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다른 것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누가복음 18장 12절 –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신약성도의 드림은 율법에 의해 규정되어 강제적이 아닙니다. ‘십일조 안 하면 재앙이나 우환(憂患)이 닥친다.’ 이런 말은 애들 장난보다도 못합니다. 성경의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신가요? 또는 ‘하나님의 것을 떼먹고, 하나님 것을 강도질하고도 여러분이 멀쩡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는 이런 식으로 성도들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의 드림은… 감사하는 마음과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드림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하는가?

고린도후서 9장 7절.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성경을 정확하게 읽읍시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율법은 마지못해서라도 하게 하지만, 복음은 자진해서만 하게 합니다.

‘나는 1/10을 정했어요.’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나는 2/10을 정했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저… 나는 1/20을 정했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나는 2/30를 정했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니까요.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십일조를 안 드리면 우환(憂患)이 생길 거야, 우리 애가 아플 거야.’ 이런 헌금은 마지못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정말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고귀한 사역, 그 놀라운 일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께 고마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아무도 강요해서도 안 되고 강요를 받아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입니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돈에 대해서도 자유를 누려야 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러분 이제까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돈 문제에 대해서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로워야 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이 십일조를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자유함 속에서 자발적으로 드릴 것을 촉구합니다. 신약성경은 몇 퍼센트를 드려야할지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1/10이 될 수도 있고, 1/20이 될 수도 있고, 2/10가 될 수도 있고, 1/5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각자가 믿음에 따라서 정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한대로 자발적이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구약의 율법을 따라서 1/10을 최소수준으로 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인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1/10을 나의 최소수준으로 정합니다. 그건 내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모두 나처럼 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자기가 구약의 율법에 따라 1/10을 철저하게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성도들에게는 더 드리기를 원하실 수도 있고, 어떤 성도들에게는 덜 드리기를 원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십일조가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고 예는 될 수 있지만 모두에게 적용해서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 조문에서 이미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는데,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침해한단 말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얼마를 드릴지는 전적으로 자신과 주님과의 문제입니다. 혹시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거든 기도하세요. ‘주님, 나의 삶이 이렇고, 나의 수입이 이렇고, 나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주님은 내가 얼마만큼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반드시 정답을 알려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 돈에 대해서조차도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자

바울 서신에서 성도들이 범할 많은 죄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고 훈계하고 권고하고 꾸짖고 있지만, 십일조 안 한 것에 대해서 한 번도 꾸짖은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네가 십일조 떼먹었으니 너는 저주받았다!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고도 네가 멀쩡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런 말씀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차원이 다릅니다. 누군가 십일조를 명령으로 가르치며 ‘반드시’라는 조항으로 가르친다면 초대교회에 있었던 율법주의자들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물질을 드림은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앙의 자유 안에서 결정될 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유지하거나 성별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좋다. 내가 모세의 율법대로 철저하게 난 12%를 드리겠다.’ 이렇게 율법에서 규정한 대로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너는 특별대우다, 너는 보너스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3절. 내가 할례를 받은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 모세의 율법조항인 십일조를 꼭 드려야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고,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율법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십일조라는 한 항목만 행합니까? 율법을 다 실행해야 합니다. 신자가 할례를 받거나 율법의 어떤 조항을 지킴으로 믿음을 내세우려는 의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다 인간적 수고를 더해 보려는 것입니다. 무의미한 일입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 때 할례가 논란의 핵심이 되었듯이 오늘날 십일조가 논란의 핵심이 되고 있음을 알았다면, 아마 성경을 바꿔서 기록했을 것 같습니다. ‘보라 나 바울이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십일조를 드리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시리라. 내가 십일조를 행하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 어떻습니까? 느낌이 팍 옵니까? 초대교회 때 할례파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아브라함의 할례를 예로 들어서 정당화하려고 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파들은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들어서 정당화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할례로부터 자유롭게 됐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십일조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을 알지 못한단 말입니까? 또한 구약에서 레위지파의 제사장직분은 오늘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제사장 직분으로 바뀌었습니다.

단지 1/10만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그거만 딱 떼어드리면 나머진 땡입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됩니까? 신약성도의 드림은 각자의 재량권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과의 영적인 사귐 가운데서 결정될 문제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몇 %를 드리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1/10만 거룩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드림에 동기는 사랑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강제적인 법조항이 없습니다. 내가 우리 교회 사역하면서 한 번도 십일조에 대해서 반드시라고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모금을 해서 가난한 형제들을 도왔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도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장17절 그러나 누가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동정하는 마음을 닫아 그를 피하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에 때문에 움직여서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운영을 걱정한다는 핑계로 구약성경의 율법조문을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강요하는 것은 당장은 유익이 있을지 모르나 각 사람이 주님과 올바른 사귐 속에서 건전하게 영적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돈에 대해서, 십일조에 대해서는 율법에 끌려 다니고, 무척 부담스럽게 노예생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 율법 아래로 다시 그리스도인들을 끌고 가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정말 성경의 본을 따라 스스로 1/10을 정해서 열심히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십일조라는 그 조문, 율법조문의 오용(誤用)이 얼마나 잘못된 적용이고, 비 성경적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충실하게 하면 뭔가 하나님을 향한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뭔가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함에 이르렀으니 오직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 여러분에겐 복음 안에서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사랑으로 서로 섬기시길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 온 율법은 이것 즉,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느니라. 사랑을 우리가 행함으로 모든 율법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든 율법의 요구와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성취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며 섬기겠습니까? 어떻게 사랑하며 살겠습니까? 사랑이신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므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삶, 돈에 대해서도, 십일조에 대해서도 주께서 가르치신 본에 따라 사랑의 동기에서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모세의 율법으로 되돌아가 자유를 잃어버리고서 부담스러운 속박에 얽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십일조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소망침례교회의 김재근 목사님 설교내용입니다.

십일조의 올바른 이해-조정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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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십일조에 관한 핵사이다 같은 설교다~

그동안 우리는 정말 제도로서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십일조라는 도구를 사용해 온 것은 아닌가?

십일조(헌금)의 진정한 목적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다. 이러한 본질을 놓치고서 하는 헌금을 주님이 받으실 리 없다…

——————-

주님은 성전을 파하러 오셨다. 성전 중심의 시스템을 파괴하러 오셨다.

오늘날 성전 시대는 끝났다. 저와 여러분이 성전이다.

사도바울은 복음으로 먹고 살 수 있었지만 그 권한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텐트메이커로서 살았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근본 취지에 비취어 보면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드린다면 어떻게 그것이 십일조 규정에 묶이겠느냐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날마다 솟아난다면 어떻게 규정에 묶이겠느냐는 거다. 오늘날 정말 성전시대가 끝이 났다면 우리가 십일조에 관한 해석은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님께 먼저 마음을 드릴 때에, 과부의 두 렙돈을 크게 보셨던 주님처럼

우리가 마음을 담아 드리는 것이 헌금이지 마음이 없는 것은 복채라고 해야 한다

십일조가 부담이 되고 짐이 되고 자원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그걸 하나님이 왜 받으시겠는가?

영이신 하나님이 재물이 왜 필요한가? 하나님께서 이 재물에 관해 말씀하신 것은

제사장에게는 재물을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놀라운 선물을 허락하신 것이고

하나님을 섬길 때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인데 가나안 땅 가서는

하나님의 기억보조 장치로서 쓰이는 것이 바로 십일조다.

그러나 그 메모리 시스템을 주님께서 제해버린 이유는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주님을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셨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보조장치가 없더라도

하나님을 날마다 기억하고 날마다 하나님께 전부를 올려드리고자 하는 놀라운 성령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로부터 자유한 사람이 된 것이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든 헌금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선언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불사르게 할 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고 사도바울이 말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고아와 과부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쓸 때

내가 드린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되돌려 받는 것을 경험하게 되실 줄 믿는다.

그것이 헌금의 참다운 의미 아니겠는가?

세금 꼬박꼬발 잘 내는 것처럼 십일조 잘 하는 것이 없다.

탈세해서 교회가 무슨 유익이 있는가?

사원들 월급 안 주고 십일조 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불쌍한 이웃 옆에 두고 말이다.

정말 재물에 관한 관점은 이웃을 유익케 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는 일이 먼저 아닌가?

제도로서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떡해든 흘러가기 위한 마음을 드리는 행위가 되기를 축복한다.

자유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들의 마음 전부를 드리면

재물관, 재물의 사용방법, 완전히 달라진다.

누군가는 지갑이 회심하지 않고서는 어떤 회심도 없다고 말한다.

기도할 때 누군가가 생각나고 기억나게 되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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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우리의 자세

난 성경을 공부했고 깨달았으며 그리고 그 이후 부터 성경데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삶은 힘들었고 제데로 풀리는 일은 없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데로 성실히 산다고 하여,

이 땅의 세상 복을 받는 것 과는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냥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감사한 것이며,

하루 세끼 밥먹고 살며,

저 하늘의 구원의 복을 받은 것만으로,

하나님의 나에 대한 은혜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교회에 가게 되면 늘상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설교를 듣고,

늘 십일조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또 갈등한다.

“말라기3장10절 말씀따라~~~~~하늘에 쌓을 복이 30배60배 되도록하여 주시고~~~~”

록펠러는 십일조를 잘하여 큰 복을 받았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지 말지며…,

등등…,

무지 (무식) 하므로 잘못 판단하고 그로 인해 어리석은 일을 행하게 된다.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여야 하며,

내 것은 십분의 일 만이 아니라 십의 십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 필요가 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다고 더 이상 죄의식에 사로 잡힐 것도 아니요,

십일조를 반드시 해야만 복을 받는 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버려야 하고,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라는 착각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 이유는 하기 문답에 있으니 잘 판단하도록 하자.

추신: 그런데 나는 군대에서 세례를 받았고 그 때 십일조를 하겠다고 서약한 기억이 없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한담?ㅎ

출처: 에스라 하우스

http://www.ezrahouse.or.kr/cop/bbs/selectBoardArticle.do?bbsId=BBSMSTR_000000000038&nttId=30708&bbsTyCode=BBST01&bbsAttrbCode=BBSA03&authFlag=Y&pageIndex=1

십일조에 대해

ㅇㅇㅇㅇㅇㅇ 2017-10-19

목사님 안녕하세요?

50여년 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십일조는 성도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며 드렸습니다.

십일조를 안하면 하나님것을 도둑질 한것이고 축복을 받으려면 십일조를 해야 하며

복을 받는지 않받는지 하나님을 시험을 해보라고 했다고 여태껏 배워왔습니다.

심지어 저희 남편은 사업이 어려워 빚을 내도 거기서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며 일억을 빌리면 천만원을 교회에 십일조로 바칩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말려도 듣지를 않습니다.

정작 본인은 어려워 힘들어 하면서도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우깁니다.

그렇게 철저히 십일조를 드리는데 삶은 왜 어려워지는 걸까요.

십일조에 대해 목사님들의 동영상을 보면 어떤 목사님은 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목사님은 구약의 십일조는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오늘날 우리와는 상관 없다고 하는데 어떤분의 말씀이 맞는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네요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목사님들의 주장은 마23:23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데

반대하신 분들은 그말은 십일조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고 하는데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안 해도 되는 지 궁금합니다.

십일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에스라 2017-10-19

1. 언제 바치는 것인가?

2. 어디서 바치는 것인가?

3. 누가 바치는 것인가?

4. 누구에게 바치는 것인가?

5. 무엇을 바치는 것인가?

6. 어떻게 바치는 것인가?

7. 왜 바치는 것인가?

간단하게 대답을 해 보겠습니다.

1. 농사를 지어서 거두어 들인 날에

2. 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 땅에서

3. 이스라엘 12지파에 속한 사람들이

4. 생업을 갖지 않는 레위인들에게

5. 농경민은 농산물로, 유목민은 가축으로

6. 온전하게 바치라고 가르치고 있다.

7. 당시 레위인들은 종교공무원이었다.

이러한 제도는 신정(神政) 시대의 제도입니다.

그 뒤에 왕정시대를 맞이 하게 되면서 국민들은 더 부담이 되었습니다.

후에 로마가 지배할 때는 이중으로 부담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한국은 신정시대도 아니고 왕정시대도 아닙니다.

민주주의 시대를 맞이하였고 지금은 국민들의 공무원들은 따로 있습니다.

국민들은 공무원들을 위하여 이미 소득의 20% 이상을 세금으로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떠 10%의 십일조를 내라고 하면 성도들의 부담은 더 커집니다.

지금의 십일조는 율법을 따라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율법을 따라서 모든 것을 행하려 하면

십일조만 실천할 것이 아니라 모든 율법을 다 준수해야 할 일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다른 율법은 다 폐기된 것처럼 가르치면서

십일조는 율법을 따라서 온전하게 바치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매우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십일조를 바치게 된 것은 우리 모두가 세례 받을 때에

그렇게 바치겠다고 서약을 했기 때문에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받을 때에 그렇게 서약을 하게 된 것은 그 교회가 속한 총회에서

그렇게 정한 것이고 교회는 이를 따라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하시는 성도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실 때 그렇게 서약하셨을 것입니다.

만약 그 교단이나 교회가 그렇게 정하지 않았고 그렇게 서약하지 않았다면

문제는 달라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십일조를 드리고 있고 우리교회 성도들은 거의 다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세례받을 때 그렇게 서약을 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하여 말이 없습니다.

부군과 같이 대출을 받은 것까지 10%을 떼서 교회에 바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잘못하고 계시는 것으로 봅니다.

대출은 소득이 아니라는 것만 생각해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나무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성도들이 가진 모든 것은 사실은 10% 뿐만 아니라

100%가 주님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당신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봉급의 100%를 다 주님께 바쳐야 하지만 그렇게 한 후에

교회는 다시 각 가정으로 생활비를 지급해야 하는데 그 때는 더 번거롭게 되고

또 말썽이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말이 많은 기독교인들이고

또 한국사람들이니 얼마나 말이 많을지는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일찍부터 정하기를 성도들이 소득의 10%을 주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따로 생업을 갖지 않고 구별된 일에 종사하는 분들의 생활비가 되게

정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에서 그런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율법을 따라서 드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교단이나 교회가 그렇게 정했고 우리 성도들은 세례받을 때에

그렇게 하겠다고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 약속들을 스스로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복을 받고 말고 하는 일은 없은 일입니다.

부군께 잘 말씀드려서 저에게 연락을 하시도록 권해 보시기 바랍니다.

샬 롬

광야의 소리(윤삼중 목사의 외침)

올바른 십일조의 정신과 삶

성경본문: 말3:7-12절

세상 사람들이나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도 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고, 경제성장과 풍요로운 사회를 좋아합니다. 성경에도 물질, 돈에 대한 구절이 1500구절에나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돈, 재물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한 신약학자는 복음서에서 나오는 예수님 교훈의 6분의 1이 돈과 관련된 교훈들이라고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3분의 1은 돈하고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지혜로운 종과 어리석은 종의 비유에서 주인은 달란트를 맡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외에도 한 여인의 드라크마 비유, 달란트 비유와 비슷한 므나 비유가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합니다. 또한 포도원 품꾼이 품삯을 받는 비유, 일만 달란트의 빚진 자의 비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불의한 돈으로 친구를 사귀는 비유 등 예수님은 이 비유 가운데 돈과 관련된 비유들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생활과 돈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돈은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주며,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현실세계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참으로 회개한 사람은 호주머니의 지갑도 회개해야 한다” 라고 말했고, 요한 칼빈도 그 사람이 가지고 돈을 어디에 주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경건한 리차드 포스트 목사님은 ‘사람들의 돈에 대한 태도를 알아보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알아볼 수가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창세기 14장에 최초로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볼 것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십일조 사건입니다. 포로로 잡혀있는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무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때에는 이 전쟁에서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지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브라함은 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라함은 자신이 전쟁에서 얻은 수많은 재산과 전리품들을 가지고 당당히 자신이 살고 있는 땅으로 돌아옵니다. 자신이 이끌고 있던 318명의의 사병들은 아브라함을 영웅처럼 칭송하고, 그와 함께 동맹을 맺었던 사람들 역시 아브라함을 위대하게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도시의 왕이었던 소돔왕은 아브라함에 가서 허리를 조아리며 아브라함의 승리를 축하합니다.

그때에 살렘왕이요.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너희 힘으로,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고,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14:20절) 외쳤습니다. 그의 깨우침을 받은 후에 아브라함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였고, 즉시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기원이라고 성경학자들을 말합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받기 전에 500여년 전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의하여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의하여,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십일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마아세르”라는 단어인데 그 의미는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받치다는 뜻이며,(겔45:11) 일반적으로 소득의 십분의 일에 대한 헌금으로 쓰이고 있습니다.(느헤미야10:38-39) 저는 어릴 때부터 십일조 생활을 해왔고, 십일조를 더 많이 드릴 수 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배웠고, 체험하였기 때문에 십일조 생활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 그런데 요즘에 인터넷을 보면 십일조 반대론자들의 글이 너무도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SNS를 통하여 이런 글을 읽으면서 십일조에 관하여 의심하거나 십일조 폐지론으로 주장하기도합니다. 십일조를 비판하는 글을 읽어보면 정말로 그럴 듯하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잘 쓴 내용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속에는 교회를 무너뜨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빼앗으려는 사단의 간계가 숨어있는 것을 잘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맥과 흐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라기에서 말하는 십일조에 관하여 거부하고, 오늘날 교회에서 실시하는 십일조는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성도들에게 알리고, 올바른 십일조를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라는 인식하여 오늘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까? 또한 어떤 정신과 자세로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까? 그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

1. 십일조는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시며, 물질의 주인이신 것을 인정하며, 믿음으로 드리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는지에 대한 그 배경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면 너희가 은을 연단한 것처럼 깨끗하게 되어서 그들이 공의로운 재물을 나 여호와께서 받칠 것이라”(1-3절) 그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될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기적같이 승리한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 드린 것처럼 너희도 십일조와 봉헌물을 이런 마음과 정신으로 드리게 될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이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릴 때에, 봉헌물을 드릴 때에 눈먼 것, 병든 것, 저는 것을 인색한 마음으로, 억지로 드렸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제는 성전도 무너지고, 제사장도 별 필요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릴 필요가 있겠는가? 거부하는 무리들도 생겨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거부함으로 성전의 운영은 급속도로 어려워지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산업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담대하게 전합니다. 8절에 보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여기서 “너희”가 누구를 가리키고 있습니까? 십일조를 반대하는 자들은 “악한 제사장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문맥으로 볼 때에 “너희” 는 제사장 뿐만 아니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6절에 보면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말라기는 너희가 바로 야곱의 자손들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7절에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도 돌아가리라” 여기서 너희는 단지 제사장들에게만 국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라기서는 제사장들에게만 국한하여 쓴 에언서가 아닙니다. 말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또한 결정적인 근거로서 9절을 보면 너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여기서 너희가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제사장들만 저주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저주를 받은 내용이 11절에 풀어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여기서 너희는 제사장의 토지와 포도나무를 의미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 제사장은 토지를 경영하고나 밭에 심은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고 사는 시대가 아닙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와 봉헌물을 받아서 먹고 삽니다. 그러므로 문맥으로 볼 때 너희는 단순히 악한 제사장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와 봉헌물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하며, 그들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에 대한 자발적 헌신의 상징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극히 높은 제사장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발적인 것이었습니까? 앞뒤 문맥을 다 살펴보아도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첫 십일조를 드릴 때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자발적으로 감사하여 드렸습니다. 제사장 멜기세덱이 요구한 것도 아니요, 주변 사람들의 권유를 받은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구나는 것을 인정하고,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헌신한 것입니다. 훗날 이것이 아브라함 이후에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이 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 역시도(창28:22) 하나님 앞에 그의 소유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서원하는 장면이 성경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 최초의 십일조를 드린 이후에 그로부터 500년이 지나가서 모세가 등장하고, 모세시대 이후에는 십일조가 성막을 유지하고 제사장과 레위인과 가난한 과부를 돕기 위한 율법의 한 부분이 됩니다. 그 후에 십일조는 유대 사회와 성전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의무와 규례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종종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 가운데 십일조가 복음적이 아니다 반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형식적인 면이 폐기되었다면 십일조 제도까지 폐기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율법 이전에 이미 십일조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구원얻기 위한 수단도 아니요, 거룩함에 도달하는 방편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진정한 정신을 따라야 한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의 형식만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율법의 그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하시는 장면이 곳곳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십일조에 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마23:23절을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은 물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장로의 유전까지 철저하게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며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는데 작은 채소의 잎사귀와 줄기에까지 십일조를 적용시켰습니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율법을 지키기보다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임을 과시하고자 겉으로만 행했습니다. 이처럼 율법을 연구하여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율법의 근본 정신 즉 의와 인과 신은 저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히 그들이 행하는 십일조를 인정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잃어버린 의와 인과 신을 가지고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의와 인과 신”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의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 즉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며, 인은 사랑과 덕을 의미하며, 신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참으로 믿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계명을 지키기는 했지만 하나님보다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눈가림만 했습니다. 즉 자신의 불의한 마음을 낱낱이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마음 중심으로 믿었다면 외식하거나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강조하시는 말씀은 ‘그러나 너희가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희가 채소까지도 철저히 구별하여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버리지 말고, 십일조 정신인 의와 신과 의를 버리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형식이 나쁘다라고 해서 율법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큰 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자들에게 무슨 약속을 하십니까?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요? 기복주의 신앙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였더니 이렇게 많은 복을 받았다는 간증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라” 는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예를들면 내가 하나님께 이 달에 100만원 십일조를 드리고 나니 하나님이 그의 말씀대로 내게 복을 부어주사 그 다음달에 1억의 수입을 주셨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잘못된 마음과 자세입니다. 그 당시에 10절의 말씀은 영적 침체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회복시켜주기 위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식어지면서 십일조에 대하여 많은 의심과 불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믿음과 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온전한 십일조로 나를 시험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표현이요, 이웃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반드시 하늘 문을 열고 그들에게 큰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꼭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릴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가 드린 십일조를 하나님이 가져가는 것도 아니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드린단 말입니까? 인간적인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기를 거부하자 하나님이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권면하고 동기부여하기 위하여 주신 메시지입니다. 예를 들면 몸의 각 지체들이 모여 맛있는 것을 혼자 먹고 모든 영광을 다 독차지 하는 입이 얇미고 질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입이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하도록 하자 그래서 발도 멈추고, 손도 멈추고, 위장도 멈추고, 모든 지체들이 자기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일이 지나고 나니까 서서히 발도, 손도, 위장도 모든 지체가 힘을 잃어버리고, 죽을지경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힘이 빠지는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입으로 음식물이 들어오지 않으므로 이런 고통이 임하는구나! 그 사실을 깨닫고 모든 지체들이 입을 통하여 음식을 먹지 아니하는 것이 곧 자신들에게 재앙이요,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존중히 여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의 출발점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누구의 강요나 협박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구별하여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지내고, 오늘날 가정을 꾸미고 살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깨닫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가장 귀한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모두 하나님의 축복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나의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십일조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우리의 응답, 감사의 응답인 것입니다. 내 가정의 주인, 내 직장과 사업장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도구와 통로에 불과합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일에 내가 겸허하게 도구가 되고, 통로가 되기를 원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시고, 우리의 일평생 주인이 되어주십니다. 제 경험상으로 볼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십일조를 드리는 자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물질의 복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많이 심은 자는 많은 복을 받게 되고, 적게 심은 자는 적은 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선한 일, 선교하는 일, 구제하는 일을 많이 하기를 소망합니다.

3. 올바른 십일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약속을 주셨습니까? 11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여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이 말씀은 이스라엘 땅에 임하는 모든 재앙을 없애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땅에는 메뚜기 재앙, 황충 재앙, 각종 질병으로 인하여 농사를 지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모든 재앙을 막아주시고, 넘치도록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정함을 받습니까? 12절에 보면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게 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는 드린 자들에게 분명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1)하늘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신다. 2)메뚜기. 황충을 금하여 주며, 각종 재난으로부터 지켜 주신다. 3)각종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라고 칭찬할 것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십일조를 굳이 바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 드린 토지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에서 함께 먹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고, 식구들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며, 삼년마다의 십일조는 자신이 사는 지역의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먹고 그들을 배부르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땅에서 나온 풍족한 양식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땅과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주인이심을 배우게 하셨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되새겼고, 무엇보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웠습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하여 이웃사랑을 실천하게 하셨고,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과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으며 함께 배부르고 즐거워하며 하나님 경외하기를 항상 배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토지가 없는 레위인과 나그네, 고아, 과부들을 위해 매 삼년마다의 그해의 십일조를 저축해 두고 그들이 그것을 먹고 배부르게 하였습니다.

십일조 규례는 토산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모든 물질은 물론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적 행위가 담겨져 있습니다. 또한 십일조로 드린 각종 토산물을 분깃이 없는 레위인들과 고아와 과부와 객들과 함께 나눔으로 구원을 공동체적으로 소유해 누린다는 구속사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족에게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십일조 규례는 보상의 개념이 아닌 구원받은 성도의 본분과 이웃 사랑의 도리 차원에서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차원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크게 잘못될 뿐만 아니라 더욱 교만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드리는 더욱 낮아지고 겸손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성장하게 되며,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멜기세덱에게 드렸던 십일조의 개념과 인색함과 억지가 아닌 마음에 정한 대로 즐겨 낼 것을 권면하는 신약의 관점(고후8:3, 9:7)을 참고해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십일조를 크게 강조가 안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신약 성경에 십일조가 강조되지 않았는가? 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십일조는 기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언급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에 이미 충분하게 십일조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바울도 재차 강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구약의 전통에 따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십일조 생활을 행하였을 것입니다. 각 교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기 때문에, 성령충만하였기 때문에 십일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서신서에 십일조를 강조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일반서신이나 바울서신에서 십일조는 율법에서 나온 것임으로 복음에 배치되기 때문에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습니까? 만약 십일조가 율법에서 나왔거나 복음에 배치가 되었다면 바울은 목숨을 걸고 강력하게 거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연구해 보아도 사도들이나 바울도 십일조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말씀은 한 구절도 없습니다. 바울이 그처럼 율법주의를 거부하였지만 한 마디도 십일조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은 십일조가 율법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 사랑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초대교회에도 자연스럽게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마땅한 응답으로써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온전한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릴 뿐만 아니라 십일조의 정신인 의와 인과 신을 함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진정한 십일조에 대한 개혁이 있어야 함은 그것을 폐지함이 아니라 믿음으로가 아닌 기복적인 조건으로 하는 것이나 세금처럼 강압적인 요구로 강조되는 것이나 바리새인들처럼 행위의 신앙의 기준으로 높임 받으려고 이름을 알리며 외식적으로 하는 그런 분위기나 교회내 전통으로 된 것 등을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더우기 십일조는 모두 목회자의 것이라거나 십일조 명단을 주보에 공개하는 것이나 일일이 호명하며 기도해 준다거나 교회 재정 충당을 위해 강요하거나 협박하는 식의 설교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십일조,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

요즈음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만 한다, 낼 필요가 없다. 양분론되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한쪽은 ‘십일조는 율법의 산물이며 신약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적도 없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은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만 한다, 아니면 도둑이다’ 라고 말라기3장의 한 구절을 인용, 은근히 협박성 강조를 함으로써,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구속 주이신 예수님을 채 만나기도 전에 포기를 해버리도록 무거운 짐의 걸림돌을 그들의 어깨 위에 올려놓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십일조를 내어야만 복을 받는다고 하여, 십일조가 모든 축복의 바로미터라도 되는 양, 성도들을 기복사상으로 유도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이런 주장 역시 주님의 구원하심(영과 육의)의 축복을 흐리게 하는 주장일 뿐, 사실 이 모두가 다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성서적 견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가 본 성서적 입장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그다음에 다른 축복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으로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며, 우리가 축복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내어서도 안 되고 도둑이 되지 않기 위해서 십일조를 의무적이거나 억지로 내어야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십일조를 내는 마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십일조를 내는 마음의 자세는 ‘물질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마음, 내게 베풀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 영 죽을 죄악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크고 감사하다는 고백, 내가 누리는 이 구원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확산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극히 적은 부분, 십 분의 일을 사랑하는 주님께 드리되 자원하는 심령으로 모든 헌물(십일조 포함)은 드려져야만 한다.

그러기에 이 사실을 바로 깨달은 어떤 이들은 십 분의 일이 아니라 십 분의 이나 삼, 더 나아가서 십 분의 구까지도 기꺼이 드리는 성도가 있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기들의 전 재산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을 수가 있었다고 본다. 우리 주님은 즐겨 내는 자를 기뻐 받으시지, 의무나 인색함으로 하는 예물은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지 흠향하지 않으신다. 주님이 받지도 않으시는 예물을 바쳐야 할 필요가 어디있는가?(고후 9:7절 참조)정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에서 뜨겁게 올라온다면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아까울 것인가?

1. 구약의 모든 율법은 폐하였고 십일조를 낼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진 것이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마5:17-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완전(to fulfill)케 하심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또 십자가 위에서 온전케 하셨다. 요한복음 19: 3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다 이루셨는가?

그것은,

첫째: 구속사역을 다 이루심(믿음으로 구원을 받음)

둘째: 율법을 온전케 하심(사랑 안에서 온전케 됨)

구속사역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여기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고,

율법을 온전케 하심이란:

마태복음 22: 37-39절 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약하여 율법은 사랑 안에서 완성됐다.

1. 위로는 하나님 사랑 2. 아래로는 이웃(사람)을 사랑.

따라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이자 믿음의 행위이다.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함이 곧 우상숭배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성도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 반드시 십 분의 일을 드림이 마땅하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은 무지에서 온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분명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궁금한가? 그렇다면 마태복음 23: 23-24절을 펴서 읽어 보시기 바란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에서 이것이란: 십일조를 말씀하심이고, 저것이란 의와 인과 신을 말씀하심이다. 곧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성립이며, 두가지(both) 모두 다 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2. 십일조가 성도의 의무이기에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하는 사람들:

십일조를 내는 것은 국민이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과 같다고 하며,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막12:17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믿음이 먼저 들어간 후에 의무는 이행가능한 것이다. 쉬운 예로, 한 국가를 보면, 아이가 어릴 때에는 보호를 받고, 18살 인가, 20살인가?, 성인식이 끝난 후에 국민의 의무를 준행 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아직도 어린 아이에게 국민의 의무 운운 하면… 그 아이가 그 나라의 국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아직 어린 관계로 그 의무가 무거운 짐이 되어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영적인 세계에도 젖을 먹어야 할 만큼 어린 아이가 있고,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사람이 있다고 바울사도를 통해서 주께서 말씀하셨다. (히5:12-14)

3. 축복받기 위해서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한다는 사람들:

“~하기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은 조건적이다. 믿음은 결코 조건적일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절 말씀)” 고 말씀하신다.

결론적으로,

십일조는 구약의 산물이요, 율법준행 자들의 케케묵은 소리라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자일 뿐,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성도)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내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하는 신앙고백 행위가 되어야 한다.

결코 의무나 억지로 해서도 안 되고 또 복을 받기(기복사상)위해서 행해서도 안 된다.

고로, 십일조는 내어야(성숙한 성도라면) 되고, 내지 않아(신앙이 어릴 때)도 되지만,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전 재산은 드리지 못해도 내 수입의 십 분의 일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이 적은 재물이 사용되어지는 곳에서 잃어진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 널리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마음 자세를 가지는 것이 구원함을 받은 성도가 십일조를 대하는 올바른 마음자세라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행하는 모든 선한 일은 반드시 넘치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며, 농사의 원리처럼 모든 헌금에도 ‘증수의 원칙’이 성립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는 말로써 고후9:6절에서 밝히고 있는 말씀의 요지이다. 단 억지로 하지 않을 때, 이 말씀이 적용이 된다.

“각각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는니라. (고후9:7절 말씀)”

[출처:목양연가(牧羊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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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십일조의 이해와 적용에 대한 총회적 입장정리

【 <교회와신앙> 】 구약에는 ‘십일조’를 명시하고 있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연보제도’를 시행했고 ‘십일조’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대 교회에서 ‘십일조’를 하는 것이 성경적일까? 율법주의는 아닐까? 예장합동(총회장 박무용 목사)은 제100회 총회에서 신학부의 연구보고에 따라 ‘십일조’는 율법주의 신앙이 아니며,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헌금이 옛 언약의 십일조를 계승하는 새 언약의 체계 속에서 시행되는 성경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십일조는 신자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고백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이라고 지적하면서, 십일조를 부정하는 마음속에 불신적 심리가 있음을 경계했다. 연구보고서는 “옛 언약의 의식법으로서 십일조의 형식은 새 언약 하에서 더 이상 계속되지 않으나 옛 언약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새 언약 백성으로서 의식법에 따른 십일조의 절차와 형식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지만 십일조의 정신과 사용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새롭고 적극적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면서 “새 언약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물질의 진정한 소유주이심을 고백하며 하나님 나라의 재정을 책임져야 할 의무를 계승한다.”고 밝혀 “십일조는 율법주의 신앙이 아니다.”고 못 박았다. 이어 “십일조의 명칭에 대해서는 사도바울이 교회와 성도 각자가 감당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성도들에게 재정적 책임을 부과하는 전략으로 정식 연보제도를 시행하고 십일조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지라도 십일조가 결코 율법주의가 아니라 성경적인 십일조다.”라고 설명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헌금이 옛 언약의 십일조를 계승하는 새 언약의 체계 속에서 시행되는 성경적인 십일조다.”고 밝혔다. 결론에서 “성경적인 십일조는 첫째 자신과 자신의 모든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고백하는 표시로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한다. 둘째 언약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자세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드려야 한다. 셋째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이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예장합동 제100회 총회 신학부의 ‘성경적인 십일조의 이해와 적용에 대한 총회적 입장정리’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 [ 예장합동 제100회 총회 신학부 연구보고서 ② ] 성경적인 십일조의 이해와 적용에 대한 총회적 입장정리 십일조 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우리 교단의 신학 정체성인 개혁신학에 답이 있다. 개혁신학이란 언약의 하나님과 그의 주권적 통치권과 이를 계시한 무오한 성경중심의 신학이다. 개혁신학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들에게 언약적인 책임을 부여하고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열정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언약신학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가르치고 헌신해야 한다. 1. 십일조는 율법주의 신앙이 아니다. 십일조는 신학적으로 특별히 성경신학적으로 점검하고 이해하고 가르치고 지도해야 한다. 옛 언약의 의식법으로서 십일조의 형식은 새 언약 하에서 더 이상 계속되지 않으나 옛 언약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새 언약 백성으로서 의식법에 따른 십일조의 절차와 형식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지만 십일조의 정신과 사용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새롭고 적극적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새 언약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물질의 진정한 소유주이심을 고백하며 하나님 나라의 재정을 책임져야 할 의무를 계승한다. 2. 십일조의 명칭에 대해서는 사도바울이 교회와 성도 각자가 감당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성도들에게 재정적 책임을 부과하는 전략으로 정식 연보제도를 시행하고 십일조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지라도 십일조가 결코 율법주의가 아니라 성경적인 십일조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헌금이 옛 언약의 십일조를 계승하는 새 언약의 체계 속에서 시행되는 성경적인 십일조다. 3. 십일조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이다. 교회는 물질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확실히 하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도록 성도에게 십일조를 가르치고 생활화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십일조를 부정하는 마음속에 불신적 심리가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4. 십일조는 신자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고백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물질을 맡은 청지기라는 사실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기쁨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결론 성경적인 십일조는 첫째 자신과 자신의 모든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고백하는 표시로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한다. 둘째 언약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자세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드려야 한다. 셋째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이 마땅하다.

출처 :<교회와 신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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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일조는 다른 복음이다> / 박창진 지음 / 진리와생명사 펴냄 / 198쪽 / 1만 원

이 책에서 저자는 십일조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십일조에 대한 성경의 원칙에 입각해서 소속 교회를 건강하고 성경적으로 세워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 그간의 십일조의 전통과 유전의 고리를 끊고 성도 개개인이 교회 개혁을 추구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언약에 대한 깊은 이해로서, 십일조를 바르게 평가하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 언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한다.

2장은 피상적인 율법 이해 벗어나기로서, 1장의 연속선상에서 율법을 다루되 십일조가 율법의 하나였던 탓에 율법의 본질에 대한 참된 인식을 하는 것을 필수적인 수순이라고 본다.

3장은 완전하게 된 율법으로서, 예수에 의해 완성된 율법 즉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 달리 표현하면 성령의 (율)법을 기초적으로 다룬다. 전반부 세 장은 성도들에게 퍼져 있는 율법에 대한 산발적인 이해를 지양하고 통합적이고 일관성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되어 있다.

4장과 5장은 각각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 평가와 십일조 개혁을 통한 교회 개혁으로서, 십일조가 오늘날에 와서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규명한다.

이 책의 주된 의도는 4장과 5장에 있으므로 여기를 중심으로 중핵이 되는 논지를 소개하고(인용 표시는 곳에 따라서 생략한다) 간략한 소감을 부기한다. 우리는 말라기에서 강조하는 십일조 준수를 거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 시대에는 당연한 의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은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시대이므로 십일조는 오늘날의 교회에는 유효하지 않다.

예수 당시에만도 예수님은 십일조를 언급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했으며 예수님도 공생애 이전에는 십일조를 하신 것으로 보인다. 십일조는 아주 특별한 율법이 아니라 다른 모든 율법 조항과 같은 조항일 뿐이다. 율법이 폐해질 때 십일조도 폐해졌으므로 십일조의 율법은 예외라고 규정할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는 십일조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

“율법의 십일조가 신약의 교회에게 이어진다면 당연히 언급되어 있어야 한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가르쳐야만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단 한 번의 언급도 없다는 사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지원하기 위한 요청에서도 십일조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방식이 십일조이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를 걷게 하고 바울 사도가 그것을 가져가면 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그런 요청은 없다(98쪽).”

그렇다면 십일조의 정신을 따르는 것은 어떤가? 모든 소득과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정신을 지키자는 취지에서 교회에서 십일조를 위시한 많은 종류의 헌금을 하면 안 되는가? 그 정신은 이어받자는 뜻은 갸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라면 십일조 헌금뿐만 아니라 주일헌금, 감사헌금, 선교헌금 등의 모든 헌금이 다 그러한 정신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 헌금만 유별난 것으로 대우되어서는 안 된다. 요점은 십일조의 정신이 십일조 준수의 논리적 이유일 수 없다는 것이다.

재정적 이유에서 보면 현실적으로 교회의 재정 확보에서 십일조는 매우 유용하다. 따라서 십일조의 유용성이 십일조 준수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십일조의 유용성을 앞세우는 것은 율법의 유용성을 앞세워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율법 준수를 그런 이유로 요구할 수 없듯이 십일조를 그런 방식으로 요구할 수 없다. 이 점을 잘 이해할 때 십일조 요구 자체가 범법 행위일 수 있다는 깨달음이 올 것이다.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이라고 간주된 것이 논리적으로 재정적으로 아무런 성경적 원리에도 입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치명적 사실이다.

십일조의 정신은 원래가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를 돕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목적을 위해서 교회는 어떻게 헌금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십일조의 정신을 계승하고 완성하는 헌금 행위이다. 한국교회는 십일조가 교회 재정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이웃 구제나 선교를 위해서 사용하는 액수는 조족지혈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말라기에 나오는 십일조 도둑질이 현대의 지금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십일조 헌금 전액을 그 정신을 회복한다는 결의를 가지고 이웃과 사회의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위한 구제 헌금으로 돌리는 십일조 완성 혁명이 필요하다.

과연 십일조를 개혁하려는 교회가 나올 것인가? 한국교회는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을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씨로서 헌금하고 사용할 것인가? 한국교회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과 전통의 유전인 십일조를 폐지 선언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 저자는 한국 성도들이 부활의 신학적 의의를 분명히 깨닫고 거기서 삶의 교훈을 얻으며 속죄 제사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주적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행자로서 부활 신앙으로 그 직무를 철저히 육화하고 수행하는 기본 도리에 충실히 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신자들 한 명 한 명이 십일조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움직일 것을 권면하고 있다. 말씀 사역자들은 진실을 알고 있어도 실천하지 않으며 이 한계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깨뜨려질 수 있다는 희망을 피력한다.

끝으로 저자는 한국교회가 십일조에 붙들려서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십일조를 받아서 재정 확보가 가능하다는 일종의 맘몬 숭배 의식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십일조의 개혁은 한국교회의 사회적 진보를 위해 꼭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비록 책의 내용 전부를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읽어 가면서 교회의 현실과 성도의 교회 내 실생활에서 부딪치는 의문과 고민들을 평이하고도 진솔하게 언급했다는 인상을 받았고 갈등하는 성도들의 내면적 질서를 정리해 줄 수 있는 성경의 원칙과 지침들을 제공하고 있기에 십일조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류의근 / 신라대 철학과 교수, 성서부산 대표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

지난 주일 설교 시간에 십일조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따로 홈페이지와 교회위챗방에 올리기로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글을 올립니다. 십일조에 대한 글을 올리는 이유는 시험에 들라는 의미가 아니라, 온전한 십일조를 하시는데 도움이 되라는 뜻과, 십일조를 모르는 초신자를 위한 교육의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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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

1) 십일조의 정신

우리나라가 생각하는 십분의 일과, 히브리사람이 생각하는 십분의 일은 다르다. 히브리 숫자에서 “1”은 “처음 것”을 상징하는데, 나머지 전부를 대표한다는 대표의 숫자이지, 열 개중 하나라는 뜻이 아니다. 즉, “열의 하나를 드린다”는 것은 그 당시 히브리 숫자의 개념상 “전부를 드린다”는 고백이다. “이 모든 것이 누구로부터 왔는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이 모든 것을 전부 주의 것으로 고백하여 드리나이다.”이런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 십일조 헌금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아홉은 내 것이라는 생각에 빠지면 십일조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나머지 아홉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쓰여져야 한다는 것이 십일조의 정신이다. 이것이 바로 십일조를 율법으로 드리는가? 아니면 은혜로 드리는가를 구분 짓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분깃점이다.

2) 모세의 율법에 언급된 십일조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에 나타난 여러 십일조 규례(신 12:5-19; 레 27:30-33; 민 18:21-32)를 근거로 십일조 헌납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① 성전유지용 십일조-소득의 십일조.

② 감사축제용 십일조-안식년을 기준으로 매 1년과 2년, 4년과 5년째에 드리는 십일조(가족 친지, 종, 레위인과 함께 나눔)

③ 이웃구제용 십일조-안식년을 기준으로 매 3년과 6년째에 드리는 십일조(자기 처소에서 레위인,나그네,가난한자, 고아,과부를 위한 구제)

3) 십일조의 잘못된 사용

① 십일조를 가지고 구제하는 경우: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레27:30)이다. 자기가 얻은 수입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 어떤 분은 십일조를 가지고 일부는 교회에 드리고, 일부는 고아원같은 곳에 드리기도 한다. 그것은 잘못된 사용이다.

② 십일조를 나눠 각종 헌금을 드리는 경우: 십일조를 일부만 드리고, 나머지로 감사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을 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십일조는 하나님이 명하신 하나님의 성물(레27:30)이기에 마음대로 하면 안된다.

③ 십일조를 개척교회에 드리는 경우: 십일조는 내가 신앙생활 하는 곳에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고향교회에 드리는 분들이 있다. 그렇게 하면 드리는 자도 잘못 드리는 것이고, 받는 교회도 잘못 받는 것이다.

④ 아예 무시하는 경우: 형편을 앞세워 아예 십일조를 하지 않는 분들도 있다. “하나님도 자기 형편을 아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십일조는 해야 한다.

4) 십일조에 대한 질문

① 십일조는 총수입에서 하는가? 순수입에서 하는가?(세전? 세후?) : 정답은 여러분의 신앙정도에 따르는 것이다.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인색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② 너무 가난해서 돈이 없고 어려운데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사랑의 하나님께서 제 상황을 이해하지 않겠는가? 먹을 것조차 없고 자식을 굶길 판인데 어떻게 십일조를 하는가? : 그럼에도 힘닿는대로 십일조를 하려고 애쓰라.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이다. 과두의 두 렙돈을 기억하라.“그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③ 빚진 상태에서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빚을 지고 산다. 그러나 빚을 졌다고 해서 자녀 등록금을 안 내는가? 우리가 빚을 지고 살아도 그런 것을 다 내고 산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만을 뒤로 미루려고 한다. 십일조는 우선순위의 싸움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이라면 빚진 상태에서도 십일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④ 예수 믿은 지 4-5년이 되었는데도 십일조를 안했는데, 이제부터 해야겠는데, 지금까지 밀린 것도 해야 되는가?: 안 해도 된다. 지금부터 정성껏 하면 된다. 그러나 양심을 따라 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

⑤ 부부간에 한 사람이 믿음이 부족하거나, 불신자이기 때문에 십일조를 반대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어떤 분은 배우자 몰래 십일조를 하는데, 나중에 문제가 커질 수 있다. 그보다는 배우자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라. 그런데도 반대를 하면, 자신의 작은 용돈이나 생활비에서부터 십일조를 하면 된다.

⑥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내다보면 십일조 낼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십일조는 언제나 소득이 있을 때 제일 먼저 떼어 놓아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온전한 십일조이다. 그렇지 않으면 십일조는 할 수 없다. 제일 먼저 떼어놓는 훈련을 해야 한다. 믿음으로 구분하는 온전한 십일조에 하나님이 복을 약속하신다.(말3:10)

⑦ 형편이 풀린 후에 십일조 생활하면 안 되는가? : 장담하는데, 이런 분은 평생 십일조를 할 수 없는 분이다. 소득이 적을 때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소득이 커질수록 더욱 못하게 되어 있다. 또한 형편이 어려울 때 십일조를 안하는 사람은 인생을 사는 동안 형편이 좋지 않은 때가 올 때마다 십일조를 못하게 된다. 십일조는 형편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따라 하는 것이다.

⑧ 십일조를 더 많이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가? : 십일조를 증권투자처럼 생각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분들이 한국에 많다. 그리고 어떤 분은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삼조를 드린다고 자랑하기도 하는데, 하나님은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십일조는 수입이 적으면 적게 드리는 것이고, 수입이 많으면 많이 드리는 것이다. 십일조는 빈부격차를 따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게 드린다고 미안할 것 없고, 많이 드린다고 과시할 것도 없다. 더 드리고 싶다면 십일조 외에 감사헌금이나 선교헌금을 하면 된다.

5) 십일조를 드릴 때 기억해야 할 사실

① 하나님은 거지가 아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주재이시고, 부와 귀의 근원이 되신다.

② 온전한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 믿음으로 드려야지, 억지로, 인색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는다.

③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말3:8-9)

==> 십일조에 대해 시험에 든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또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런 사람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십일조를 했다는 행위 때문에 “믿음 없는 자”가 자신을 “믿음 있는 자”로 착각하게 되는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믿음도 없고, 은혜도 인정하지 못하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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